엄마는 공룡이 지구상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라 말하곤 했다. 어릴 적 당신께서 보여주신 <쥬라기 공원> 씨리즈와 각종 다큐멘터리는 작고 동그란 나의 머리로부터 영혼을 쏙 빼어버리기에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인간이 얼마나 오만한 동물인지 깨달은 것도 모두 공룡 덕택이었다. 그들 앞에 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기에는 너무나...
언젠가부터 청년 김 아무개의 몸 이곳저곳에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림잡아 열 개는 되어 보이는 피어싱이 자리 잡은 두 귀와 열 손가락, 발가락에 쉴 새 없이 고름이 차올랐다. 한쪽이 나으면 다른 한쪽이 부어오르고, 그쪽이 나으면 또 다른 쪽이 말썽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웬만한 경우에는 부은 곳이 자연스레 가라앉으며 치유되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몸이 가벼워졌다. 갖가지 걱정과 고민이 뒤섞여 요동치던 머릿속도 깨끗이 비워졌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새벽에 미장원 앞 쓰레기봉투를 들고 오는 일 외에는 밖에 나가지를 않으니, 마치 동굴에서 백 일 동안 쑥과 마늘만을 먹어야 했던 곰과 호랑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이백일인가. 삼백일이었던가, 뭐 아무튼. 새하얘진 머릿속에는 무언가...
뭔 소리야, 네가 카프카냐?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친구의 목소리는 졸음에 절어 짜증이 묻어나왔다. 아니, 진짜라니까. 거울 앞에 선 나는 떨리는 손을 머리 위로 가져가 비죽 튀어나온 무언가를 톡, 건드리고는 몸을 움츠린다. 그리고 카프카는 작가잖아. 굳이 비유를 하자면 책 주인공을 끌고 와야지. 당황스러움에 중요치 않은 말들이 튀어나온다. 그것은 너무나 빨...
물을 약하게 틀어야 더 빨리 데워진다고 했다. 샤워기가 졸졸 소리를 내며 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허리를 펴 곧게 선 나는 거울 속의 맨 몸에 눈길을 둔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가슴팍이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몸을 조금씩 비틀어보자면 빛을 받는 각도가 바뀌며 쇄골과 갈비뼈가 짙은 그림자와 함께 모습을 보인다. 어제보다 더, 어제는 그제보다...
그 새를 본 것은 7월 어느 무더운 밤이었다. 사실은 밤이었는지, 늦은 저녁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 날 저녁이면서 그 날 밤에 새를 만났다. 여하튼 좁아터진 원룸이 거대한 냄비가 된 듯 끓어올랐던 것은 분명하다. 이 리터짜리 생수를 페트병 째로 들이켜도 끈끈하고 불쾌한 열기는 가실 줄을 몰랐다. 입 안 가득 들어찬 미적지근한 물...
눈 앞이 캄캄하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시야를 덮은 눈꺼풀 너머로는 희미한 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느껴지지 않는다. 차갑고 거센 물살만이 내 온몸을 쓸어 만진다.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그저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어딜 가든 어둡고 추운 것은 똑같지만, 자리를 옮긴다는 그 기분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나는 해류를 좋아했다. 처음에...
버스는 출발했다. 어디로 향하는 줄도 모르고 버스에 몸을 실은 나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랜덤재생 버튼을 누르자 흘러나온 노래는 그린데이의 웨이크 미 업 웬 셉텐버 엔즈. 짧은 전주에 이어 청량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제서야 나는 버스의 번호를 확인한다. 937번. 처음 타보는 버스다. 노선을 천천히 읽어보니 알 수 없는 동네의 이름만 가득하다. 매미아...
끼-익. 단은 여느 때와 같이 힘없이 빌라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늘 아침 마감을 치르느라 어젯밤을 꼴딱 샌 탓에,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다.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어두운 복도를 걷는다. 복도 끝 두번째 집에 사는 단은 문을 열려다가 멈칫, 하고는 허리를 숙인다. 단은 문틈에 끼인 엽서를 집어 들어 이국적인 도시를 담은 앞면을 본다. 사진 속 ...
나는 케이크를 떨어 뜨 렸 다 . 북적거리던 카페의 모든 사람들이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부끄러움에 그 자리에 멈춰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아, 바닥을 제대로 볼걸. 이 빌어먹을, 끈이 잘 풀리는 신발을 신지 말걸. 아니, 그냥 애초에 공강 시간에 카페에 오지 말걸. 동방에서 시간 때울걸…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
프라이팬이 파란 불꽃 위에서 달구어지고 있다. 포도씨유를 둥글게 뿌리고 프라이팬을 두어 바퀴 돌린다. 낡은 가스 레인지 옆에 놓인, 할부가 한참 남은 핸드폰에서는 요즘 즐겨 듣는 인터넷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있다. 오늘도 채팅창에 많은 분들이 모였는데요. 출석부터 부르고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서둘러 채팅창에 입장한다. DJ가 직접 기타를 치며 ...
어느 겨울날이었다. 단과 건은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건이 침묵을 깼다. 나, 유학 준비하려고. 단은 바삐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 건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열심히 해.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말투였다. 어디로 가는지 안 궁금해? 건이 물었다. 프랑스 아니야? 아니, 영국으로 가. 웬 영국? 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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