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설킨 이어폰을 푸는 재이의 앞에는 라지 사이즈 감자튀김과 펩시콜라 한 캔이 놓여있다. 근무 시간 내내 냉장실 속에 있던 캔 음료의 표면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었고 그중 일부는 또르르 굴러내려 와 테이블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겨우 풀어낸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은 재이는 자연스레 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 초 이어진 후에야 드디어 콜...
너의 방에는 온갖 지도가 그득하니 쌓여 있지. 수많은 지역, 국가, 그리고 세계지도, 또 평면도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은 것들이 방 한구석을 꽉꽉 채우고 있어. 사실 너에겐 방이라 할 것은 없지만 말이야. 우리가 사는 집은 너무너무 좁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걸 집이라 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보통 사람들은 업소용 대형 냉장고 박스를 집이라 ...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반면 우나는 귤 맛 아이스바를 와삭와삭 씹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그러니깐, 다른 애가 좋아졌다구, 내 말은.” 무시무시한 여자애. 그러니 저렇게 이 시린 줄도 모르지. 나는 눈가가 시큰하니 울음이 올라오는 것을 감추려 고개를 홱 돌렸으나, 빨개진 귀와 떨리는 어깨가 ‘나 지금 울고 있소’라 말해주고 있...
속이 빈 자줏빛 튜브에서는 ‘푸슉-‘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한국에서 들고 온 트리트먼트가 바닥났다는 뜻이다. 아직 집에 돌아가려면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하는데.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샤워 부스에서 나와 욕실 바닥에 물 자국을 잔뜩 남기며 후닥닥 발걸음을 옮겼다. 살짝 열린 문틈 새로 이름을 부르자 누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영오의 대답이 ...
이상한 일이다. 도대체 일어날 생각이 있기는 한 건지,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짐무는 꼼짝을 않고 누워있다. 시계를 보니 두 시 반. 아침은 고사하고 점심밥을 먹기에도 조금 늦은 시간이다. 죽었나? 하고 쳐다보니, 가슴이 약간 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아직 살아있긴 한가 보다. 그렇게 삼십 분이 더 흘러 세 시가 되어서야 짐무는 겨우 눈을 떴다. 그는 잠...
꼼지락거리는 나의 발가락 열 개를 본다. 며칠이 지나도, 몇 개월이 흘러도 자라지 않는 나의 발톱. 세로줄이 죽죽 그어진, 곧 갈라질 것만 같은 발톱을 하나씩 눈으로 훑고 시선을 저 멀리 보낸다.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의 노랗고 붉고 또 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연희동의 낡은 건물 위 옥탑방, 그 작은 지붕에 걸터앉아 맞는 아침이 몇 번째인지 기억도...
무언가 미끄덩하고, 차갑고, 또... ...유연한 것이, 부드럽고 느릿하게 몸에 감겨온다. 가물거리는 눈을 겨우 뜬 민은 두 다리를 둘둘 감싸며 기어 올라오는 뱀을 보았다. "아아아아아..." 끊이질 않는 낮은 비명에 이를 닦다 말고 침실로 달려온 비암은, 이내 배신감에 몸을 가누지 못 했다. "순아, 어떻게 날 두고..." "누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
김수진. 그는 모 대학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에 재학 중인 스물두 살 청년이다. 주변인들은 그를 '비암'이라 부른다. 그것은 수진이 스스로 붙인 별명이다. 비암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뱀이다. 그의 취미는 교내 도서관에서 두툼한 파충류 도감을 펼쳐보는 일과, 뱀 관련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빌려 열댓 번을 돌려 보며 영상을 통째로 ...
날이 끄물끄물한 것이, 곧 비가 쏟아지려나 보다. 경이는 잠이 덜 깬 몸을 겨우 일으켜 블라인드를 내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양쪽 귀에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우고는 여섯 시간가량의 플레이 리스트를 찾아 재생한다. 장르를 불문한 다양한 뮤지션들의 음악이 마구 섞였음에도 경이는 그 순서와 각각의 가사를 몽땅 외워버린 지 오...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옵니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묶고 에어컨 리모콘의 제습 버튼을 누릅니다. 눅눅한 여름 장마는 나를 괴롭게 합니다. 나의 몸이 부패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예, 저는 말 그대로 썩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태어날 적부터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나는 진작에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요. 평범하...
"조민니." "왜애-" "너 속바지 다 보여." "이거 속바지 아니구 팬틴데." "......" "트렁크 팬티. 몰라?" 민니는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있기를 좋아한다. 이현은 그런 민니가 아주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오늘처럼 교복 치마를 입고 매달릴 때면 눈앞이 아찔해졌다. 체육복 바지를 들고 다니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 하여간 제멋대로인 민니였다. 이현...
어두운 골목길, 힘없이 끔뻑이는 가로등이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서 있다. 묵직한 가방을 둘러맨 나는 아스팔트 바닥을 깊이 눌러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시커멓고 우둘투둘한 바닥에는 작은 발자국이 찍히고 이내 사라진다. 그렇게 십여 분을 더 걸어 올라 칠이 벗겨진 철문 앞에 서서 가방의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에 꽂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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